✝️
탈북민의 사회적응과 부적응
+
탈북민의 사회적응과 부적응
들어가면서 2024년 9월까지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민의 수는 34,259명입니다. 그들 중 유럽을 비롯한 제3국에 재이주하는 사람들과 사망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2023년 5월 기준으로 한국에 거주하는 탈북민의 수는 30,866명입니다. 2024년에 통일부에서 밝힌 「북한이탈주민 입국현황」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19년까지 해마다 천명 이상의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에 입국하다가 2020년부터 현재까지 그 수가 대폭 감소하였습니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의 과반수는 사회정착 10년을 훌쩍 넘기고 있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건만, 탈북민에게 있어서 한국 사회는 여전히 언어만 어느 정도 통할 뿐 낯선 사회입니다. 그 가운데서 누군가는 사회에 잘 적응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본 발제는 탈북민의 사회적응 실태를 살펴본 후, 나름의 대안을 모색하려고 합니다. 사회적응 실태 사회 만족도와 생계 상황 남북하나재단에서 15세 이상의 탈북민 2,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3년 북한이탈주민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9.3.%가 “남한생활에 만족한다”고 답했고, 18.1%가 “보통”이라고 답변했으며, 2.6%가 “불만족”이라고 답변했습니다. 또한 탈북민 정착실태와 경제활동 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고용률 조사에서는 60.5%로 조사이래 가장 높게 나왔으며, 실업률은 4.5%로 가장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남북하나재단이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탈북민의 사회정착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듯 보이지만, 실상을 파헤쳐보면 생계적인 긴장감이 발견됩니다. 2023년 12월 24일 “데일리안” 기사에 따르면, “서울연구원이 19세 이상∼60세 미만 서울 거주 탈북민 대상으로 2022년 12월 15일부터 2023년 1월 16일까지 설문조사한 결과 37.7%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였고, 1년간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응답률은 69.4%에 달했습니다. 한 달 생활비는 58.7%가 100만원 미만이었고, 100만∼200만원 29.3%, 200만∼300만원 8.3%였습니다. 300만∼400만원은 2.0%, 400만원 이상은 1.7%에 그쳤습니다. 생활비 최다 지출 항목에서는 식비(35.3%), 교육비(15.7%), 주거 관련 비용(12.3%), 부채상환(12.0%), 월세(11.7%) 순으로 나왔습니다. 서울시 거주 탈북민의 46.3%는 공공임대주택(하나원에서 배정받은 집과 그 외 공공임대)에서 살고 있었고, 28.7%는 보증금이 있는 월세, 13.7%는 전세 거주 중이었습니다. 본인 소유의 집에 산다는 응답률은 5.7%였습니다.” 이처럼 거의 대부분의 탈북민이 한국생활에 만족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실상을 파고들면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일자리 확보와 거주지 이동 탈북민의 경제적 어려움이 해소되려면 무엇보다도 일자리부터 확보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차원에서 많은 관심과 노력을 쏟고 있습니다. 하지만, 탈북민의 입장에서는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탈북민들은 주변의 인맥을 동원하고 취업광고를 살피는 등, 스스로의 노력으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습니다. 서울에 거주하던 다수의 탈북민은 일자리 확보를 위해 경기도 권으로 이사하고 있습니다. 2024년 9월 통일부에서 발표한 탈북민 지역별 거주현황에 따르면, 서울시에 거주한 탈북민의 수는 6,355명이며, 경기도와 인천시에 거주한 탈북민의 수는 14,129명입니다. 서울에 비해 경기도나 인천시에 두 배가 넘는 탈북민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자리 확보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탈북민의 85%는 노동 적령기인 20대~50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서울지역보다는 경기도권에서 일자리 찾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거주지를 그곳으로 옮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성교회에 소속된 교우들의 상황만 놓고 봐도, 거의 대부분의 탈북민이 서울에서 경기도로 거주지를 옮기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들은 서울에서보다 경기도에서 보다 여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범법행위 탈북민의 사회정착에서 나타나는 심각한 문제는 범법행위입니다. 2021년 10월 29일 “자주시보” 기사에 따르면, 경찰청 보안국에서 1998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8,88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그들 중의 약 20%인 1,697명이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가운데 899명은 형사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중 폭력 603건, 절도 64건, 상해 58건, 위·변조 46건, 사기 35건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2023년 10월 11일 “파이내셜” 기사에 따르면, 전국의 교도소에 수감된 탈북민의 수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법무부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탈북민 수감자는 2018년부터 145~180명 사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166명이 수감되었습니다. 죄명으로 보면 가장 많은 건 마약류입니다. 마약사범은 2019년부터 매년 50명대를 이어가고 있고, 윤석열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에 53명을 기록했습니다. 사기횡령은 매년 20건 전후, 살인사건은 11~17건으로 뒤를 잇고 있습니다. 정부는 개인정보보호를 이유로 탈북민 범죄율을 파악하지 않고, 마약중독 예방교육도 늘리지 않아 탈북민을 범죄 사각지대로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탈북민의 71.9%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성범죄 피해 집계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통일부는 윤호중 의원에게 범죄율과 마찬가지로 현행법상 사유 없이 조회가 어렵다는 이유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돈의 힘, 쾌락의 힘이 요동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탈북민의 범법행위가 사라지려면 준법교육과 일자리 창출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그들의 의식이 기독교 정신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정신은 탐욕과 범죄의 길로 향하는 인간의 발걸음을 사랑과 의의 길로 돌려세우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살통계의 의혹 2019년 탈북민 모자의 아사 사건을 계기로 한국사회는 탈북민의 복지와 자살에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탈북민의 자살률이 일반 국민의 자살률보다 높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2022년 1월 13일 “세계일보”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국가인권위는 성명을 통해 2016년∼2020년 탈북민 사망자 10명 중 1명의 사인이 자살로 집계돼 일반 국민의 자살률 대비 2배 이상 높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통일부는 “탈북민의 자살률은 일반 국민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반박했습니다. 통일부는 지난 2006∼2020년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탈북민 27.3명, 일반 국민 27.1명으로 비슷한 수치라고 설명했습니다. 어떻게 통계를 하는가에 따라, 자살률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자유를 찾아 생명을 걸고 이 땅에 온 탈북민들이 자살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탈북민의 자살에는 여러 원인들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 사회로부터 받는 편견이나 차별이 큰 몫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편견과 차별 탈북민의 사회정착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끝으로 편견과 차별입니다. 2022년 2월 23일 “한국일보”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금융경제연구원에서는 국내 성인 남녀 4,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중국 동포와 탈북민을 국내 이주민 보다 부정적으로 인식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연구팀은 그 이유를 교류 부족으로 꼽았습니다. 설문조사에서 중국 동포와의 교류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20.1%, 탈북민과의 교류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9.2%에 그쳤습니다. 반면에 전체 이주민과의 교류 경험은 41.9%에 달했습니다. 탈북민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감지할 수 있는 또 다른 통계조사들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서 발표한 「2024 통일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탈북민에 대한 친근감이 17.5%로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과반수의 응답자들은 탈북민을 수용하고 지원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남북하나재단에서 15세 이상의 탈북민 2,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3년 북한이탈주민 사회통합조사」에서는 지난 1년 간 차별이나 무시를 경험했다는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16%로 나왔습니다. 차별이나 무시를 당한 이유로는 72.8%가 말투나 생활방식, 태도 등 문화적 소통방식이 달랐기 때문으로 봤으며, 45.5%는 남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탈북민의 존재에 대한 부정적 인식(세금부담 증가 등) 때문으로 봤습니다(복수응답 방식으로 설문조사가 진행 됨). 몇 가지 사례를 들면, 모 탈북민은 간호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시 모 병원에 취직하여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병원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수간호사가 되고 간호부장까지 되자, 일부 간호사들이 탈북민 간호사의 지시를 받을 수 없다고 항의 했으며, 결국 세 명의 간호사가 병원을 떠났다고 합니다. 다음은 송파구에 있는 모 어린이집에서 있은 일입니다. 모 탈북민은 그 어린이집에 취직하여 주방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탈북민이 만든 음식을 먹일 수 없다고 항의하여 퇴사해야만 했습니다. 이 외에도 탈북민이 한국 사회로부터 받는 차별은 수없이 많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편견은 사회의 마지노선입니다. 편견이 심해지면 차별이 발생하고, 차별은 갈등과 분노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어 사회의 평화를 위협합니다. 어느 사회에나 편견은 있습니다. 한국 사회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단, 편견에서 그쳐야지, 편견이 심해지면 차별로 이어집니다. 차별은 사회의 불화를 일으키는 도화선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이상사회는 편견이 사라지는 사회입니다. 편견이 사라지려면 남과 북의 사람들이 자주 만나야 합니다. 한국 사람과 탈북민이 자주 만나 서로의 삶을 나눌 때 편견의 벽은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교회는 그 역할을 선두에서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사회 영국의 지성인이자 탬플턴상 수상자인 조너선 색슨이 자신의 책, “사회의 재창조”에 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나그네(이주민)에게 세 개의 서로 다른 사회가 초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첫 번째 사회는 별장 같은 사회입니다. 나그네는 근사한 별장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곳의 현지인들은 기꺼이 문을 열며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단, 나그네가 그 사회의 주인이 되려면, 현지의 주류집단에 동화되어야만 합니다. 주류집단에 동화되지 않는다면 늘 손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 사회는 호텔 같은 사회입니다. 나그네는 화려한 호텔에서 투숙객처럼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단, 그곳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에는 어떠한 주류문화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저마다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회는 통합보다는 분리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사회는 고향 같은 사회입니다. 나그네는 주류의 도움으로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누군가가 건설한 사회에 들어가 손님처럼 머문다든지, 일정한 계약을 맺고 정해진 자유를 누리는 사회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사회의 주류와 함께 힘을 모아 자신들의 통합된 사회를 만듭니다. 주류와 비주류 모두에게 정체성의 가치가 부여됩니다. 주류집단은 나그네가 비록 자신들과 다르지만 함께 공공의 선을 창조합니다. 나그네에게 가장 바람직한 사회는 세 번째 사회입니다. 조너선 색스는 나그네에게 필요한 사회가 세 번째 사회인 이유는 서로가 동화되지 않으면서도 서로 통합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서로의 존재를 수용하며 살 때, 삶이 더 풍요로워진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완벽히 다른 존재라면 우리는 소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완벽히 똑같은 존재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할 말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조너선 색스에 따르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서 배울 것이 있으며, 다양성이 증가할수록 그 사회의 문화는 보다 풍요로워지게 됩니다. 조너선 색스가 말했던 ‘별장 같은 사회’, ‘호텔 같은 사회’, ‘고향 같은 사회’ 중에서 한국 사회는 탈북민에게 어떤 사회로 비춰지고 있습니까? 여기에서 탈북민 사회정착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탈북민에게 있어서 한국 사회는 ‘별장 같은 사회’입니다. 오늘날의 현실을 보면, 한국 사회는 탈북민에게 ‘한국사람화’ 될 것을 요구합니다. 한국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한국사회가 당신들을 잘 받아 줄 것이며, 당신들은 이곳에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되고 있습니다. 탈북민이 아무리 ‘한국사람화’ 되어서 한국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도 탈북민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편견과 차별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사람화’된 탈북민은 회사에 입사할 때, 굳이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가 탈북민을 수용하는데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국 사회가 탈북민에게 있어, ‘별장 같은 사회’가 아닌, ‘고향 같은 사회’로 자리매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부분을 “나가는 말”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나가는 말 한국사회에 농후한 탈북민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탈북민을 ‘한국사람화’ 시켜야 한다는 의식을 내려놔야 합니다. 그리할 때, 탈북민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문제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통일은 또 다른 재앙을 몰고 올 것입니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민 3만여 명이 5천만 명이 사는 한국 사회에서 편견과 차별을 감수하며 어떻게 하나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통일의 날이 이르면 한국 사회는 2천 만의 북한 백성들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때 발생하게 될 가장 큰 문제는 편견과 차별의 문제라고 예상됩니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에 탈북민 3만 4천여 명을 보내주신 이유는 한국 사회가 탈북민을 통해 향후 2천만의 북한 백성까지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는 탈북민을 통해 이론이 아닌 실전으로 통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북한 사회에서 살면서 몸에 배인 그들의 의식과 삶의 태도를 그대로 존중하고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 탈북민과의 소통의 장을 만들고 확장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탈북민과 함께하는 여행이나 봉사활동을 통해 편견과 차별의 장벽을 허물 수 있습니다. 탈북민이 출연한 영상 채널을 통해 그들이 살았던 북한사회를 잘 알아 갈 수 있고, 그들의 고충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선두에서 감당할 수 있는 공동체는 대한민국 국민의 천만 명이 소속된 거대 공동체인 교회라고 생각하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는 상처 입고 지친 가운데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거대 토양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일에 모두가 잘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 34절) 글쓴이, 손정열
✝️
믿음의 눈으로 통일을 바라봅시다.
+
믿음의 눈으로 통일을 바라봅시다.
입양된 24살 청년이 어느 날 친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멀리서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밝은 표정으로 누군가와 일하는 모습을 어느새 보다가 그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다가가기를 포기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옆에 있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버지와 당신은 동일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다가가기를 주저합니까?” 그러자 그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친아버지인데, 너무 낯섭니다.” 친아버지를 만나면 그 순간 그 어떤 친근감이라는 것이 다가와 나를 만족하게 해줄 것 같았는데, 정작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친근감이 생기지 않고, 오히려 낯설음이 크게 생겨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를 멀리서 바라보고 돌아서는 그 청년의 모습에서 분단된 한반도가 떠오릅니다. 남과 북은 78년이라는 짧지 않은 분단의 세월을 보내면서 많이 이질화되었습니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동질성은 분명한데 정작 마주하면 낯설기만 합니다.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에서 12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1년 통일의식조사”에 따르면 20대에서 ‘통일을 원한다’고 답변한 응답자는 27.8%에 그쳤습니다. “통일연구원”에서 발표한 “KINU 통일의식조사2022”에 따르면 응답자의 대부분이 통일보다는 ‘평화적 분단’을 원했습니다. 그 만큼 북한 사회가 낯선 것입니다. 백성의 인권을 짓밟으며 3대 세습을 이어가는 북한독재체제를 바라보는 한국 국민의 시선은 차가울 수밖에 없습니다. 민족의 내일을 통일이 아닌, 평화적 분단으로 바라보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통일 소망을 더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이 일에 한국의 교회와 탈북민이 선두에서 주도적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이 둘로 분단되어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남과 북이 복음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으로 탈북민 3만 5천여 명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는 탈북민들을 바라보며 통일의 소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일각에서는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하지 못한다며 통일의 내일을 비관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비관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과연 탈북민들이 한국사회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탈북민의 한국사회정착 기준을 ‘삶의 만족도’에 둔다면 결과는 뒤바뀝니다. “남북하나재단”이 2022년 5월, 탈북민 219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남한 생활에 만족하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77.4%, 보통이라고 답변한 응답자는 20.2%, 불만족하다는 2.5%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거의 대부분의 탈북민들이 한국에서의 삶을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의 삶을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탈북민들의 사회정착을 문제 삼아 통일의 내일을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탈북민들과 더불어 다가올 통일을 미리 경험하며 통일 소망을 북돋아야 합니다. 탈북민은 한국 사회에 들어와 교회라는 공동체를 접하게 됩니다. 탈북민들의 방문에 한국 교회는 많이 낯설어하며 본의 아니게 경계의 장벽을 세우기도 하고, 지배하려는 욕구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상대를 수용해가며 하나가 됩니다. 탈북민들은 교회를 통해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는 탈북민들을 통해 북한을 품게 되고, 탈북민들은 교회를 통해 한국을 품게 됩니다. 생텍 쥐페리의 책, “어린 왕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너에게 그 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네가 그 꽃을 위해 시간을 내준 것 때문이야.” 장미꽃 한 송이를 마음에 품고 있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한 말입니다. 여행 중이던 어린 왕자는 여우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그 꽃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발걸음이 있음을 떠올리게 해주는 우화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통일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오른다면 우리의 발걸음은 통일을 향해 내 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복음통일의 그 날은 밝아올 것입니다. 2013년 1월 20일에 개척된 대성교회는 복음통일의 소망을 불태우며 10년의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지극히 연약한 공동체를 늘 지켜주시고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는 북한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갑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13:34) 글쓴이, 손정열
✝️
고통과 슬픔 마저도 주의 축복과 사랑
+
고통과 슬픔 마저도 주의 축복과 사랑
무더운 더위가 어서 지나가길 소망하지만, 더위가 사라지면 시간도 함께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련해집니다.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것을 보면,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를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밤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는 배고픈 시간이 참 야속했습니다. 그 시간이 더욱 가혹하고 절망스러웠던 건 다음 날이 밝아도 여전히 먹을 것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배가 너무 고팠던 나머지, 장마당에서 남이 다 먹고 쏟아버린 국수국물에 범벅이 된 진흙더미에서 국수찌꺼기를 골라 허겁지겁 주워 먹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땟국물로 얼룩진 작은 손이 장사꾼 아주머니 바구니속 흰 밀가루 빵을 집고 있었습니다. “잘 못 했습니다.”라는 말을 채 입밖으로 꺼낼 새도 없이 커다란 주먹이 시야를 가렸고, 이윽고 눈앞엔 별빛이 번쩍였습니다. 그날 해가 질 때까지 진흙탕에 나뒹굴며 맞았는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입니다. 그때 그 시절엔 모두가 그랬습니다. 숨이 붙어있는 아이들은 장마당 구석구석에 옹기종기 붙어 앉아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끈질기게 생명의 끈을 붙잡고 있었고, 무리에 끼지 못한 아이들은 뼈에 가죽만 씌운 듯 앙상한 몰골로 싸늘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꽃제비는 딱히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굶어 죽거나, 행방불명 되거나, 자녀를 돌볼 의지를 상실했거나 등 다양한 이유로 부모와 분리되었을 때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나오게 됩니다. 그 시절은 그게 보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 정도를 굶어 9살 되던 해에 국경을 넘어 풍요의 땅 중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한국에서 온 선교사님들을 만나 꿈만 같았던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이가 어리니 성경보다는 읽기 편한 성경만화책으로 기독교를 배우게 되었는데, 만화에 그려진 모든 내용과 이미지를 아무런 필터 없이 순수하게 믿었습니다. 11살이 되어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되는 열차칸에서 “하나님,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기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제발 이 열차를 멈춰주세요!”라는 기도를 수없이 되뇌었고, 몇 번이고 눈을 떠서 확인해보았지만, 열차는 북한 땅에 도착하고 나서야 멈추었습니다. 인계받을 보위부원들이 열차에 올라오고 나서는 더 이상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약 1년간 자강도보위부, 강계집결소, 청진도집결소, 온성노동단련대를 거치며 수감생활을 계속해 왔습니다. 다음 해에 숨만 붙어 있는 채로 석방되기까지 정말 많은 기도를 했었습니다. 애원해 보고, 원망도 해보고, 사과도 해보고, 또 다시 원망하고... 도통 그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눈꺼풀조차 들어 올릴 힘이 없어 누운 채로 대소변을 봐야 하는 허약3도에 이르러서는 의식으로 기도하는 것조차 버거웠습니다. 죽음의 경계선상에서 한발만 더 내딛으면 평온함에 이를 것만 같았는데, 그 한발을 내딛기가 너무나 힘겨웠습니다.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과 생각이 분명히 있었는데, 그게 기억이 나질 않았고, 지독한 고요와 쓸쓸함이 물밀 듯 밀려와 하염없이 펑펑 울었는데, 눈물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누군가 발로 툭툭 치더니 “야, 이건 뭐야? 빨리...” 라는 소리가 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여러 사람에 들려 밖으로 버려지면서 사실상 석방되었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재탈북을 하고나서는 홀로 한 조선족 집사님이 운영하시는 가정교회에 위탁되어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약 3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4시에 일어나 거실(예배당)을 쓸고 닦고, 방석과 성경책을 진열해 놓고 가족분들이 나오면 5시에 함께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신앙과 열정이 넘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 교회에서 미움 받지 않고, 쫓겨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교회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부담으로 느껴졌고, 그 기간동안 단 한번도 “은혜”를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교회 구성원은 집사님, 집사님의 조카 2명, 조카사위와 조카아들, 그리고 저까지 6명이었는데, 3년간 15번의 생일파티를 하는 동안 저의 생일은 쇠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저에게 생일을 물어보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관심과 호의를 받는 기간은 한국선교사님이나 선교단체가 방문하는 기간인데, 항상 그 시기가 되면 집사님과 집사님 가족분들의 희생과 그분들에 대한 감사를 방문하신 분들께 표현해야 했고, 신앙심이 날로 깊어 지고 있다는 것을 성경구절 암송 등으로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게 제가 완수해야 할 임무 같은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선교팀이 다녀가면 피아노도 생기고, 컴퓨터도 생기고, 이것저것 많은 기구들이 생기곤 했는데, 너무 귀한 물품들이다보니 한번 만져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나 14살 한해도 마무리가 될 무렵, 교인 한 분의 입을 통해 그 동안 저에 대한 후원 명목으로 매달 최소 3,000위안씩 집사님께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그때 당시 공장 노동자 평균 월급이 400~500위안이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항상 교회와 집사님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왔었습니다. 교인 자제분들이 입다가 작아진 옷이나 신발을 가져와주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입었고, 이발비 2위안도 손 내밀기 어려워 오랜만에 한번 이발을 할 때는 최대한 짧게 잘랐고, 세탁기 돌리는 전기세가 아까워 제 빨래는 항상 손으로 빨곤 했습니다.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에 그 돈이 얼마나 큰돈인지 작은 돈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3년 내내 저에게 강조한 “너 때문에 어렵다...”라는 그런 말들에 큰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채 교회를 나온 후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때의 경험이 교회에 대해 ‘위선’이라는 이미지를 각인하게 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후 꽤 오랜 시간동안 그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날 수록 내적 갈등은 더욱 깊어져만 갔습니다. 그 곳을 떠난 후 중국 이곳 저곳을 떠돌다 종국에는 청도라는 도시에 자리를 잡게 되고 약 2년여간 거리 생활을 하였습니다. 식당에 취직하여 개도 잡아보고, 호텔 주차장에서 세차도 해보고, 당구장, 노래방, 클럽나이트 등을 전전하며 같은 처지의 친구를 사귀거나, 누군가에게는 도움을 주고받기도 하면서 정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PC방에 취직하고 싶어 300위안 학원비를 내고 꼬박 3개월을 다녀 중국어타이핑, 오피스(워드/엑셀/PPT), 인터넷 검색, e메일 등을 배운 건 아직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일요일에는 항상 지역에 있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큰 교회에 몰래 들어가 구석에 앉아 예배를 드리곤 했는데, 찬송가를 들으며 혼자 펑펑 울다가 예배가 다 끝나기 전에 먼저 나오곤 했습니다. 이때 제가 인지한 하나님은 저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제가 슬퍼하면 하나님도 슬퍼하시기에, 그 하나님의 슬픔이 저를 위로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런 신앙관은 마치 거울 같아서, 나의 상태에 따라 하나님의 속성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슬프면 하나님도 슬프고, 내가 즐거우면 하나님도 즐겁고, 내가 연약하면 하나님도 똑같이 연약해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 보니 힘겨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강한 하나님을 만들어 내려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압박하면서 강한 사람으로 자의식하려 했고, 그게 강박에 가까워지면서 궁극적으로 냉소적이고 폭력적인 성품으로 거듭 진화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 와서 새로운 사회를 접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 시작했지만, 신앙관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대학공부를 하며 더해진 철학적 기반과 인본주의적 사상이 합리성이라는 가면을 씌워주면서 기존의 비뚤어진 신앙관을 더욱 정교하고 교묘한 아주 더러운 신앙관으로 오히려 악화시켰습니다. 교만하기 그지없는 완성형 인간이 된 것입니다. 이때 제가 대성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저는 입에 칼을 문 독사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당시 제마음속 깊이 인식하는 교회라는 곳은 위선의 끝판왕이자 사람마음으로 장사하는 파렴치한 집단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저를 포섭하려 했던 신천지까지도 “죄송하지만, 혼자 공부하시고 오지마시라”고 했겠습니까. 제가 목사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어차피 다 돈이 목적인 프로 꾼들인데 왜 이렇게 사람이 융통성 없이 경직되어 있을까? 남들 하는 만큼만 해도 눈먼 돈이 오고 가는 더러운 시장에서 평균 이상은 할 텐데, 뭣 하러 이렇게 진지하게 신앙 얘기를 할까?” 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제 딴에는 그런 걱정이 목사님을 위하는 딱한 마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목사님은 더욱더 말씀을 강조하고, 저는 더욱더 그것이 위선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제 눈에는 온통 자신의 안위와 재물과, 권력과, 영향력만을 챙기려 하는 소위 “선량”하신 분들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가까이에도 있었고, 멀리에도 있었고 어디에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무리 옆구리를 찔러보아도 목사님은 전혀 반응도 없었고, 딱히 변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제가 못 참고 나간 것이 대성교회와의 연이 마무리된 10년 전입니다. 목사님은 아직도 저를 10년 전 충혁이와 함께 교회를 찾아와준 초기 맴버로 추켜세워 주시곤 하는데, 너무너무 부끄럽습니다. 목사님을 대면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제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감히 상상이 안됩니다. 하나님을 만나 회심을 경험하고 보니 저는 그 누구보다도 위선적이고, 냉소적이며, 폭력적이며, 세상 누구보다 교만하고, 교활하며, 악독했던 인간이었습니다. 다시 찾은 대성교회는 아사 직전에 처한 나의 영혼이 오랫동안 그리워하며 사모하던 곳이었단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칠흑 같은 심연의 끝자락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순수의 결정체를 보았고, 이 고독한 영혼이 오랫동안 본연의 자리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됩니다. 30년간 나를 옥죄어 왔던 근원에 대한 질문, 모든 의심, 증오, 편견, 그리고 부르짖음에 대한 주 나의 아버지의 응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도 분명한 확신을, 스스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그 믿음을 선물처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은혜”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살아온 모든 시간이, 고통과 슬픔마저도 주의 축복과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미워했던 사람들의 영혼을 직시하게 되었고 증오가 아닌 연민과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이나마 경험할 수 있었고, 그러한 변화 자체가 황홀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기도는 더욱 분명하고 단순해졌고, 오직 주님 앞에 바로 서기만을 원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내 영혼이 반응하고, 공감하고, 기뻐했습니다. 과거의 저는 나의 신앙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이미 내 안에 거하고, 나의 시선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다윗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길 원하고, 날마다 나를 부인하며 주의 길을 따르길 원할 뿐입니다. 대성교회에 다시 출석하게 되면서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한 깨달음도 신앙의 변화만큼이나 뚜렸하게 드러났습니다. 태초부터 현재까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유일하신 분이시며, 현재도 동일하게 살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받은 놀라운 은혜가 언어와 몸짓, 그리고 삶을 통해 고백 될 때,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은혜가 공감을 초월하여 울림을 이끌어내고, 이러한 경험이 우리의 성장을 촉진시키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고, 목사님의 설교에 내가 ‘아멘’이라고 답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 살아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한 이런 실체적인 경험이 나의 삶에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10여평 남짓한 대성교회의 예배당은 여전히 작습니다. 편의 시설 하나 없고, 유치부 교사도 없어서 젊은 여전도사님이 1인다역을 하며 바삐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곳엔 무엇보다 큰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차 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의 평안한 쉼이 있습니다. 차고 흘러넘치는 축복에 감사할 수밖에 없고,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의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랄 것이 뭐가 더 있겠습니까. 시간이 더없이 빨리 흘러간다고 느껴지는 건 하나님께 속한 지금 이 순간순간이 너무 행복해서인 듯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글쓴이, 김경일
✝️
우리가 함께 부를 노래 "아리랑"
+
우리가 함께 부를 노래 "아리랑"
남과 북이 한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최고의 노래는 “아리랑”입니다. 그 만큼 노래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공감대가 깊습니다. 이 노래의 유래에 대해 기록한 책이 있어 소개합니다. ‘님 웨일즈’와 ‘김산’(본명 장지락)이 공동으로 저술한 이 책의 제목은 “아리랑”입니다. 저자인 ‘김산’은 아리랑이 씌어진 시대를 1700년 경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아리랑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울 근처에 아리랑 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 꼭대기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우뚝 솟아 있었다. 조선왕조의 압정 하에서 이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이나 사형대로 사용되었다. 수만 명의 죄수가 이 노송의 옹이 진 가지에 목이 매여 죽었다. 그리고 시체는 옆에 있는 벼랑으로 던져졌다. 그중에는 산적도 있었고 일반 죄수도 있었다. 정부를 비판한 학자도 있었고, 조선 왕족의 적들도 있었고, 반역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들이었다. 이런 젊은이 중의 한 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 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민중에게 알려진 뒤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즐거움과 슬픔에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이 애끊는 노래가 조선의 모든 감옥에 메아리쳤다. 이윽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아리랑’은 이 나라의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이 노래의 내용은 끊임없이 어려움을 뛰어넘고 또 뛰어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죽음만이 남게 될 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노래는 죽음의 노래이지, 삶의 노래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서 승리가 태어날 수도 있다. 이 오래된 ‘아리랑’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구절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더욱 많은 사람이 ‘압록강을 건너’ 유랑하고 있다. 그렇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는 돌아가게 될 것이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었을 때 원래의 노래에 다섯 구절이 더 첨부되었다. 요즈음에는 가사가 다른 노래가 거의 100여 곡이나 된다. 만주 벌판 어디에서나 조선인 의용병이건 중국인이건 모두가 이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아리랑은 사회의 불의에 저항한 자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그러므로 밝게 웃으며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닙니다. 아리랑은 불의를 향한 저항의 노래였으며, 일제를 향한 저항의 노래였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미래의 승리로 이어지길 바라는 순교자들의 노래였습니다. 분단의 한을 품은 우리 민족이 다가올 통일의 그 날에 서로 손을 잡고 아리랑을 부를 것입니다. 그 날에 한반도는 순교자들의 함성과 더불어 진동할 것이며, 세상은 평화의 복음으로 하나가 된 축복의 땅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게 될 것입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 글쓴이, 손정열
✝️
북한의 “신분계층”과 “신고문화”
+
북한의 “신분계층”과 “신고문화”
북한은 출신성분에 따라 인생이 좌우되는 사회입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유사한 신분 차별이 사회에 녹아 있습니다. 사회의 핵심계층에는 항일혁명열사들과 그들의 가족들, 6.25전쟁참가자 및 피살자들과 그들의 가족들, 노동자와 농민이 속합니다. 사회의 동요계층에는 소·중상공업자들과 월남자 가족들, 중국 귀환자들과 경제사범 등, 사상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속하며, 사회의 적대계층에는 기독교인과 지주·자본가를 비롯한 반체제 성향의 사람들이 속합니다. 북한 사회에서 권력을 얻으려면 충성심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적대계층은 아무리 충성심을 발휘해도 핵심계층으로 도약할 수 없을뿐더러 노동당에 가입조차 할 수 없습니다. 동요계층은 자신의 헌신도에 따라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을 쥘 수 있는 계층은 핵심계층입니다. 여기에서 간부로 승진하려는 기류가 팽배해집니다. 승진을 위해 상부에 적극적으로 아부하게 되고 경쟁자의 오점을 고발함으로써 자신의 충성심을 인정받고자 합니다. 북한 독재정권은 당과 행정기관, 보위부와 보안소를 통해 백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이뤄지는 살벌한 감시 속에서 주민들은 오로지 생존만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북한에서 군복무를 한 모 탈북민은 군대에 다음과 같은 감시망이 존재한다고 증언했습니다. “북한의 군대는 매 중대마다 중대장, 정치지도원, 보위지도원이 있으며, 주간일정을 하나 세워도 세 명이 함께 협력하여 작성한 후 상부에 보고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삼선 통제시스템은 중대에서부터 군단까지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특정 지휘관이 함부로 행정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서로의 감시통제를 받으며 맡은 일을 하게 됩니다.” “세 사람이 모이면 그 중에 한 사람은 보위부 스파이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북한의 신고체계는 살벌합니다. 2011년에 입국한 모 탈북 청년은 자신이 받아온 감시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옆집 사람이 우리 집을 늘 감시했습니다. 주방에서 기름 볶는 소리나 냄새만 나도 창문으로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심지어 내가 시장에서 옷 한 벌 사 입어도 신고해서 나는 조사기관에 불려가 비판서를 써야만 했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감시한 이유는 어머니가 탈북한 것으로 동네에 소문이 났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신고문화는 독재정권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반세기 넘게 이어온 신고문화 때문에 사회에는 정직과 신뢰보다는 거짓과 불신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가해자로, 누군가는 피해자로 살아가는 북한 땅은 갈등과 분쟁의 화약고나 다름없습니다. 문제해결의 열쇠는 십자가 복음에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교회는 복음의 능력으로 다가오는 통일을 잘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글쓴이, 손정열